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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실망하게 되는 이유는 무얼까요? 하기는 그래요. 제가 반했던 대상은 당신의 인생이지 당신 그 자체는 아니니까요. 매료를, 매혹을, 웬만해서는 걷어내기도 어려울 환상을 다 헛것으로 만드는 게 그대에게는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왕 실망시킬 것이면 벗겨도 또 벗겨도 끝이 안보일 것 같았던 껍질 수천겹을 한꺼풀씩 정성스럽게 분리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엔 그랬죠. 평소 좋아하며 먹던 석류도 혀 끝이 찌릿하게 셔서 입에 못대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비웅덩이에 발 젖는게 싫다는 이유로 만남을 없애고, 오늘은 날이 흐려 몸이 영 좋지 못하다면서 나약한 척을 하고요. 마지막은 사실이기는 했어요. 그래도 사소한 고통이 설렘을 이기지 못하던 시절은 다 지고 사라졌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진 것 같았습니다.
환상은 얼마나 일순간인가요, 그것을 이렇게 증명으로 보여주어야만 마음을 서로 확인해볼 수 있는 걸까요. 당시가 제아무리 가식과 위선이었더라도, 숨이 몸을 돌고 나갈 때 마다 상대를 보고 싶었던 첫마음은 예쁘고도 또 활동사진적인 환상이었다고 저는 그래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정녕 제가 당신의 인생의 흐름을 넘어서 그 속에 몸뚱이를 말고 있는 본체를 아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모두 제멋대로 흘러가라고 놔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요, 실망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였고 실망시키는 일은 정작 당신이 성공했으니까요. 물론 그대는 나처럼 옹졸한 의도로 제게 그랬을 것은 아닐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만치 충격적인 상처를 주리라곤 당신이 몰랐듯이 저도 몰랐거든요. 주체는, 그래요, 뭐든 하는 사람은 전혀 알지를 못하더라고요. 이젠 다 됐어요. 점점 처연해지네요. 끝에 와서 이러려던 것은 결코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