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이미 어릴 때 부터 소년과 함께였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죽음을 보아야 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소년의 곁을 떠나야 했었다. 소년은 잃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빼앗긴 것은 울고 보챈다고 해서 되돌릴 수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금기에 손을 대는 것은 더욱 쉬웠다.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는 욕구, 어린아이다운 소망, 간절함, 도피, 이 모든 것 앞에 망설임은 나설 자리가 없었다. '더이상 홀로 남아있는건 싫어‘. 소년은 그저 한 마디를 되뇌었다.
마음속으로 끝도 없이 되뇌었던 말이었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일종의 주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의지할 존재를 잃고 지내온 몇 년, 허물과 지내온 시간, 그 시간 내내 전전긍긍했던 긴장감을 풀 장소를 찾지 못했던 소년에게 그는 그림자였어야 할 존재임에도 빛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무의식에 담그어 놨던 진심을 내뱉는 순간 그들의 연결점은 하나가 되었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살아 숨쉬던 사람들의 얼굴, 죽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을 얼굴, 죽은지 오래일 이들이 비추는 얼굴, 그 온갖 얼굴들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현재를 서럽게 만들었다.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일찍 떠난 아버지와 운명에 잡아먹혀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로 과거를 그립게 만들었다. 소년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뒤였다. 받아들여야만 했다고 하는 쪽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은 분명 고통을 무디게 느끼도록 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결국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야, 꼬맹이, 무슨 생각 하는데 그렇게 넋을 빼놓고 있어?”
“어…뭐?”
잡념을 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뒤로 돌려 들자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검은 눈동자가 넋을 잃은 꼬마 강림의 얼굴을 비추었다. 소년은 거울을 보듯이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뭐냐, 너…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마치 소년을 그대로 키워 놓은 듯 한 남자는 새삼스럽다는 듯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내비추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난데없이 솟아오르는 억울함을 감출 수 없어 꼬마 강림은 그대로 말 없이 고개를 다시 돌렸다. 평소같으면 냉소적이든 무심하든 바로 말로 되받아 쳤을 터인데, 예상을 벗어난 소년의 반응에 강림은 당황했다.
“야, 뭐야? …설마 삐친거냐?”
예의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을 놀리다가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을 때 그러하듯이 강림 역시 달래려는 투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얘가 왜이래,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혼자 푸념하듯 중얼거렸지만 그런 말로 소년이 동요 할 리는 없었다. 여기서 더 말을 걸어보아도 소용 없음을 일찍 예견한 강림은 못미덥다는 듯한 기색을 비추면서도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꼬마 강림은 그를 쳐다보는 일이 없었다.
실은 그 무심한 표정 조차도 위로가 되었다. 오히려 일상적인 모습일수록 더욱 위안이 되었다. 낯선 대상은 두려웠다. 날 찾아왔더라고 하더라도 언제 떠날지 모르는 존재이다. 소년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존재만을 믿으려 했다. 그랬기에 또래들과도, 급우들과도 친해 질 일은 없었다. 그들 역시 언제 서로를 잊을지 모른다. 잃고 상처 받을 바에야 차라리 연결점을 두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꼬마 강림은 자신이 누리던 일상에 안주해왔다. 불안을 감추며 안심하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런 시도 조차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일상을 꿰뚫으려는 대상이 두렵고도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한 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존재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듯 하면서도 곁을 지켜주는 그가 어느 새 소년의 일상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건과 장면은 분명 막 그린 그림처럼 선명하게 눈 앞에 떠오르는데도 도무지 그 두려움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필름처럼 일련의 사건을 떠올리면 그 날이 존재함은 분명히 기억이 남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감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어쩌면 몸이 충격을 담을 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하고 일부를 지워버린 것일 지도 모른다. 그저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 날의 사건은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싫었다. 좁은 곳이 싫었다. 아무도 없이 홀로 몸을 벽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좁고 어두운 공간은 지옥만큼 끔찍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이 곳으로 떠밀어 놓은 자는 대체 누구지?
반사적으로 숨은 목에 걸리고 눈동자는 바라볼 길을 잃었다. 머릿 속은 암전 그 자체였다. 여태껏 잘 피해 왔다고 생각했음에도 소년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이 생각해 온 지옥에 갇히게 되었다. 손을 뻗으면 문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성을 뒤덮는 두려움이 이미 몸을 옭아맨 채였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내가 잘못했나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비명이 머릿 속에서 메아리를 반복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아서 엄마가 잡혀 간 걸까요?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호소가 서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소년에게 있어서 막힌 어둠은 곧 죽음으로 향하는 길과 같았다. 그곳에서 그는 가족을 잃었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상실이 반복되었지만…그래서 제 곁에 아무도 남겨 놓지 않은 걸까요?
물에 내던져지듯 정처 없는 어둠 속에 던져진 소년의 의식은 이미 무중력을 헤매이고 있었다. 어둠이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이윽고 기도를 타고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머잖아 폐 속까지 전부 차오르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래, 만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