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도, 단순한 회상 속에서도 목을 치던 칼날의 서늘함은 마치 어제 겪은 감각인 것만 같이 생생했다. 그럴 때 마다 두 손이 급히 목을 붙잡았지만 손톱으로조차 긁힌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제 기능을 잃은 성대를 가지고서 진실을 말하지 못할 일은 없다. 짧은 숨과 함께 튀어나온 목소리로 그 사실을 새삼 확인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말을 건네려 했던 상대가 이 세상에 더는 없는데.
날아가던 목과 함께 기억도 이 몸을 떠났더라면 그것은 과연 내게 이로운 일이었을까. 사랑하는 얼굴을 더 기억하지 못한다면 슬프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는 것을 분명함을 알고도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아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슬프다. 전능한 신이 보기에는 하드웨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 몸을 배려해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권을 어찌 써야 좋을지 갈등할 필요도 없이 그 기억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고 있게 되었으나, 이것이 내게 있어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그 모습을 알지 못한다는 박탈감이 분했지만 관측자일 뿐인 존재에게는 성역을 엿볼 권한이 없었다. 모든 일은 인과를 통해서 정해지므로, 그 틀을 깰 자신이 없는 이상.
그녀는 이번 세계에서도 ‘반드시’ 그를 쫓아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무대는 꿈이 아니었나 의심이 될 정도로 이 세상은 평온하다. 신기루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데, 잊을 수 없는 그 모습이 내 앞에 서있다. 이전 기억 속에 살인자로 남아 있는 소녀가 지금은 나의 친구다. 그녀에게 나와 같은 기억이 일절 없음은 분명한 사실인데, 찌그러진 마음이 자꾸 현실을 의심하고 왜곡하려 한다. “왜 그래?” 도무지 살의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 그 순수한 눈빛에 못 이겨 나도 이내 느슨한 미소를 흘렸지만, 목을 가르는 아찔한 통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극적인 반전을 선사하는 드라마는 더는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행복’, 이 단어 외에는 현재를 부를 말이 달리 없다. 옛날에 벌어진 비극을 생각하면 이것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지 모른다. 수백 수천 수억이 짓는 웃음, 그 웃음을 보기 위해 쓰였던 총알 수천 개, 온갖 흉기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잘 된 일이야. 행복한 일이지. 이런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세상을 누구보다 바랬었던 존재가 없다는 모순만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은가.
그녀는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리다가도 이따금씩 허공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듯 했는데, 지금도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에 끼지 않고 그저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감상에 젖은 소녀의 모습일 뿐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바로 그를 알던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일상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가도 찰나의 순간에 사라지기에 도무지 끝까지 떠올릴 수 없는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채로 그리워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그녀가 안타깝게 여겨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무지 얄밉기만 한 그 모습을 두고 나는 그의 얼굴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별 것 아닌 우월감을 느꼈다. 이럴 때만은 남은 기억이 기쁘구나. 추하고 비겁한 질투심이라고 비난받아도 상관없다. 선택받을 수 없음을 아는 자의 열등감이 치졸한 구석에서 우위를 점하려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꺼멓게 녹슨 마음을 감추고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야 하는 나는 어찌 되었든 열등할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그러다가 내 눈과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에 얼마나 악의라곤 없었는가. 가짜 영혼을 담아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는 찰나 내가 발견한 것은 보통 때와 달리 훨씬 더 멀어서 세상을 초월하는 장소를 바라보는 것만 같은 그 눈이었다.
우려했던 일들 중 대부분이 실제 현실로 다가왔었다. 흉조를 포착하는 감은 이번에도 역시 틀리지 않았다. 반쪽짜리 성역이 흔들리고, 그녀가 저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원인 뒤에 결과가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면 그녀는 자신의 발길을 이끄는 존재가 있음을 알았으므로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을 쫓게 된다는 결과로써 이곳에 온 것이다. 어김없이 지켜지는 지겨운 저 불문율은 몇 번째 세계로 가든지 지금처럼 날 붙잡을 것이다. 규칙에 순응해야 하는 안타까운 소년, 이 앞에 서있는 소녀는 규칙에 아랑곳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려는데…그녀가 지나갈 길을 내줄 것을 요구한다. 과거를 모르는 자의 당당함은 내게 있어 뻔뻔스러움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내게는 단순한 투기(妬忌) 이외에 그녀를 막아야 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자연스럽게 목으로 향하는 손가락 끝을 의식하고 손을 내렸다. 목구멍 끄트머리까지 끓는 용암 같은 욕설들을 삼키며 그녀를 보았다. 껍데기는 이전 세계에 있었던 미친 존재와 똑같다. 그러나 그 때와는 달리 늦게나마 사랑받은 이 영혼은 어떤 잔혹사도 모른다. 불쌍한 아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른다’ 는 사실이야말로 내 안에 깔린 분노를 들추어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사라진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알지 못한다. 지금 그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자의 목을 망설임 없이 베었다는 사실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2년 전 그에게 구원받아 그 옛날의 잘못을 되풀이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은 여러모로 분명한 축복이다. 하지만 내가 저 여자 몫의 고통까지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관측자로 만들어진 가공품의 본분이니까.’
눈에는 보이지 않는 틀을 깨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리라고 마음먹었었다.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조건으로 이제 내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상황이 변해도 날 때부터 새겨진 본성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 자신이 내게 있어 제일 끔찍한 속박구라는 사실을 잊으려 애쓰는 동시에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날 묶는 올가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나는 진정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손에 쥔 무기는 쓸모없다. 똑같이 그 목을 쳐낸다고 한들 본질적인 지배 법칙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증오를 면전에 드러내고도 나는 복수할 수도, 그녀를 막아낼 수도 없었다. 신이 바라는 인과가 이런 것이라면 나는 거역할 수 없다. 허무함을 내게 일깨워준 뒤에 떠나가는 그녀는, 그렇지. 세 번째로 맞은 이 세상을 사는 그녀에게는 지은 죄가 없었다.
그에게 내 안부를 전해 줘. 그와 함께 본 별은 어땠는지 내게 말해 줘.
덧없이 고운 그녀가 내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가 저 멀리 어둠 속으로부터 들린다. 그녀는 분명 웃음을 지어보이고서 문을 건넜다.
내가 눈물 흘릴 일은 무엇 하나 없었다.
글에서는 원작대로 아키세->유키테루지만 사실 내가 아키유노라는 사상 최대 사약을 팠었기에 그런 요소를 무의식중에 넣은 것 같음(와장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