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같은 손으로 아무리 쇠창살을 쥐고 흔들어보아도 누구 하나 구해주러 오는 이는 없다. 사방을 창살로 휘두른 작은 우리 안에 갇히는 일 자체가 제일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굶주림을 버티는 일도 가장 힘든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 이 순간 오로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내 손을 잡고 슬픔과 공포를 함께 이겨내 줄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든 마음을 지탱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조차 나간 뒤에는 이 방, 이 우리는 구덩이보다 숨 막히고 어두운 공황 그 자체야.
어째서 어둠 속에서는 이토록 공포를 느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일까. 빛보다 어둠 속에서 지낸 시간이 더욱 많은데도 결코 이 두려움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이는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지. 엄마도 지금 이런 어둠 속에서 홀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아닐까.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서 나를 어둠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까. 엄마, 그렇다면 나는 엄마와 손을 마주 잡고 어둠을 견디고 싶어. 아침을 맞고 싶어…….
거짓말을 일삼는 아이는 벌을 받아야 하지. 어쩌면 코가 길어져서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저는 거짓말쟁이가 아닌 걸요. 사랑받고 싶은 아이니까 진실만 말할 거야. ‘엄마는 병에 걸렸어.’ 엄마는 마음이 아픈 거야. ‘아빠는 우리를 사랑해.’ 일이 바쁘니까 늦는 것뿐이야. 엄마는 무서워. 엄마는 아파. 엄마는 두려워. 하지만 유노는 엄마를 사랑해. 엄마는 곧 나을 거고 아빠도 이제는 일찍 집에 돌아 오실거야. 다 함께 식탁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녁 식사를 하자. 엄마, 아빠가 좋아. 내게 이름을 지어 주었는걸…. ‘당신도 좋아하는 사람 있어?’
소름끼친다. 과거의 믿음을 잊고 스스로 무너지고만 나는 분명 그들이 빚어낸 비극 그 자체인데 저 시절에 질투를 느끼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토록 바래왔던 풍경이 눈앞에 있는데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네가 바로 나, 그렇다면 ‘나’는 구원받고 가족의 사랑을 되찾았어…그런데 어째서 ‘나’에게는 저런 기쁨을 누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가?
별도 달도 없는 밤하늘을 메우는 검은 연기, 정체불명의 폭격, 불안감을 이끌어내는 사이렌 소리, 파낸 구덩이 깊이만큼 닳아 없어진 도덕관념, 위태로운 세상, 멸망하는 피해의식, 모두 저들을 없애고 그를 가두면 완전히 내 것이 되리라 생각했던 자기만족은 누구나가 수긍하는 나의 오만이었다.
찢어진 옷을 고치는 데에 쓰이던 실이 엉켰을 때처럼 사소한 일 조차 숙고하던 때가 있었다. 시간을 쏟아 손수 매듭을 풀 것인가, 아예 잘라내고 처음부터 시작할 것인가. 직접 푸는 법을 선택한다면 나 자신의 수고로움만 바치면 된다. 잘라낸다면 나의 편의를 얻는 대가로 아직 쓸 수 있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 나는 모두 다 잘라내기로 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길은 아니었다.
완전한 과거로 돌아가도 가족은 여전히 서로를 학대하고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죽이고 그에게 의존하기로 결심했을 때에 과연 세상은 아름다워졌다고 말할 수 있었나?
지금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이미 주어진 삶과 책임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저 시절의 ‘나’는 아직 진정한 시작을 맞지 않았다. 과거에 품었던 희망과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나는 과거의 나를 배신한 존재다. 분명 어린 나라면 배신자가 되는 미래를 걷지는 않을 것이다.
익숙해지면 모든 것이 나아지리라 생각했어. 하지만…아아…무엇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어….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더 욕심을 내보자. 이번 세계에서 유영해 다닐 존재는 이 몸이 아니라 빛을 먹고 자랄 순수하고 곧은 정신이야. 모든 것을 던져내고 그들의 사랑을, 그의 사랑을 몸소 느낀 내게 고통이란 더는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칼이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와도 나는 울지 않는다. 병든 엄마와 무심한 아빠가 없는 세상, 유대감에 집착할 일 없는 세상으로 향하자. 엄마, 아빠, 그 곳이야말로 진정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이야.